등산 중 갑자기 안개 속에 비친 거대한 사람 그림자를 본 적이 있을지 모른다.
멀리서 보면 마치 거인이 서 있는 듯한 형체가 움직이고, 그 주위로 둥근 무지개빛 고리가 퍼져나간다.
이 신비로운 현상은 ‘브로켄 현상(Brocken Spectre)’이라 불리며, 독일 브로켄산에서 처음 보고된 데서 이름이 유래된 것이다.
사람의 그림자가 산등성이 너머의 구름이나 안개에 비치면서, 빛이 산란되어 무지개 고리가 함께 형성되는 신기한 대기광학 현상이다.
브로켄 현상이 일어나는 원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태양이 관찰자 뒤쪽에 있을 때, 빛이 앞으로 있는 구름이나 안개 입자에 닿아 산란되어 보이는것 이다.
이때 관찰자의 그림자가 구름 위에 비치게 되는데, 수증기 입자가 빛을 여러 방향으로 흩뿌리면서
그림자 주변에 둥근 색 띠가 생기는 것이다. 이 색 띠가 바로 ‘글로리(Glory)’로, 무지개와는 다른 방식으로 형성된다.
무지개는 물방울 안에서 굴절과 반사가 일어나 생기지만, 글로리는 구름 속의 미세한 물방울이
빛을 뒤로 반사시키는 ‘후방산란(backscattering)’ 때문에 만들어진다.
그래서 무지개보다 훨씬 작고, 관찰자의 그림자를 중심으로 둥근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브로켄 현상은 특정한 조건이 맞아야만 관찰할 수 있다.
먼저, 해가 낮게 떠서 관찰자의 등 뒤로 빛을 비춰야 한다.
둘째, 앞쪽에는 짙지 않은 안개나 얇은 구름이 있어야 한다.
너무 두꺼우면 빛이 투과되지 않고, 너무 희미하면 그림자가 맺히지 않는다.
셋째, 관찰자가 높은 지대에 있어야 한다. 산 정상이나 능선, 또는 비행기 안에서 가장 자주 관찰된다.
한국에서도 설악산, 한라산, 지리산 등에서 운이 좋으면 볼 수 있고, 항공기 착륙 전후에도 종종 나타난다.
안개는 입자 하나하나가 불규칙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그림자가 일정하지 않고,
시간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며 크기도 변하게된다.
이 때문에 그림자가 실제보다 훨씬 크고, 움직이는 듯 보인다.
또한 태양이 낮게 비추면 그림자의 길이가 길어지기 때문에 마치 거대한 존재가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
실제로는 자신의 그림자가 구름 위에 투사된 것이지만, 순간적으로는 초자연적인 경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예전에는 ‘산의 정령이 나타났다’거나 ‘신의 그림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브로켄 현상은 늘 글로리와 함께 나타난다.
그림자 주변에 동심원 형태의 무지개빛 고리가 생기는데, 이는 공기 중 수증기 입자가 매우 미세하기 때문이다.
입자 크기가 10마이크로미터 이하로 작을수록 빛이 더 고르게 산란되어 색 띠가 선명해진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이 연속된 얇은 고리로 나타나며, 때로는 두세 겹 이상 겹쳐 보이기도 한다.
비행기 창가에서도 날씨가 좋을 때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때는 비행기 그림자가 구름 위에 맺히며
주변에 둥근 무지개 고리가 따라붙는다.
브로켄 현상은 자연과 인간의 시선이 함께 만들어낸 장면이다.
빛이 만들어내는 단순한 물리 현상이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의 위치와 각도가 정확히 맞아야만 생긴다.
조금만 각도가 어긋나도 그림자는 사라지고, 무지개 고리도 흐려진다.
즉, 이 현상은 하늘이 임의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눈을 중심으로 완성되는 개인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같은 순간에도 옆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보인다.
브로켄 현상은 단순한 착시가 아니다.
태양의 각도, 구름의 밀도, 물방울의 크기, 그리고 관찰자의 위치가 정확히 맞아야만 생긴다.
그 복잡한 조건 속에서 하늘은 잠시 우리에게 빛의 비밀을 보여준다.
안개 속에서 나타난 거대한 그림자는 사실 우리 자신이고,
그 주변에 피어오르는 무지개빛 고리는 대기 속 물리학이 들려주는 시각적 교향곡이다.
산 위의 한순간, 자연은 과학으로 만들어낸 환상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인다.
내가 캐나다 북부지역에 처음 갔을 때, 처음으로 빙무(Ice Fog) 라는것을 보았다.안개라고 하기엔 너무 반짝였고, 눈발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