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의 끝 무렵, 해가 막 지고 난 뒤 서쪽 하늘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말 흥미로운 장면은 해가 진 반대편, 즉 동쪽 하늘에서 펼쳐진다. 어느 날 나는 일몰 후 천천히 걷다가 동쪽 하늘 끝자락을 보았고, 그곳에서 은은한 분홍빛 띠가 수평선 위로 길게 떠 있었던 것을 보았다.
처음엔 구름이 붉게 물든 줄 알았지만, 주변은 맑은 하늘뿐이었다. 그 뒤로 나는 그 분홍빛 띠를 볼 때마다 마치, 자연이 하루를 마무리하며 남겨둔 흔적처럼 느껴졌다. 이 현상이 바로 비너스의 띠 이다.
분홍빛 띠가 생기는 이유
비너스의 띠는 태양 빛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간 뒤에도 대기 상층을 비스듬히 비추기 때문에 나타나는 색이다.
햇빛은 지표면보다 훨씬 높은 고도까지 도달하고, 그곳에서 산란된 빛이 다시 우리 눈에 들어오면서 분홍빛 또는 연한 자주빛을 남긴다.
특히 태양 빛 중 파란 파장은 이미 대부분 산란되어 사라지고, 상대적으로 긴 파장의 붉은·주황 계열 빛이 하늘 상층부에서 다시 한 번 퍼져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비너스의 띠는 일몰 뒤에도 잠시 동안 하늘에 잔향처럼 남는다.
지평선 아래 어둠과 맞닿은 색의 경계선
비너스의 띠 아래에는 지구 그림자가 진하게 자리 잡는다.
일몰 뒤 동쪽 하늘이 아래쪽은 푸른 회색으로, 위쪽은 분홍빛으로 나뉘어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표면과 대기 하층은 이미 태양빛이 닿지 않아서 어두워지고
그 위의 대기층만 붉은빛을 받아 물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두 개의 색층이 분리되는 것이다.
나는 이 경계를 볼 때마다, 지구라는 거대한 구체가 태양빛을 차단하며 그 자체로 ‘하늘의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비너스의 띠는 이 어둠과 빛이 맞닿는 지점, 그 가장 섬세한 경계선 인셈이다.
분홍빛 띠가 더 선명해지는 조건
비너스의 띠는 날마다 색이 다르다. 어떤 날은 연분홍에 가깝게, 어떤 날은 보라빛에 가깝게 물든다. 그 이유는 다음 요소로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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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 중 먼지나 습도의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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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간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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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양과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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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 지점의 고도
특히 공기 중 입자가 적당히 있는 날이면 빛이 고르게 산란되며 더 선명한 분홍빛을 띤다.
반대로 하늘이 너무 뿌옇거나 대기가 탁한 날에는 띠가 희미하게 흐려진다.
실제 경험에서 느낀 비너스의 띠
내가 비너스의 띠를 가장 인상적으로 봤던 때는 겨울이었다.
차갑고 건조한 공기는 색의 경계를 더 뚜렷하게 만들었고,
길게 늘어진 분홍빛 띠가 마치 지평선 위에 놓인 얇은 실크 처럼 보였다.그 순간 나는 빛으로 그려진 두 개의 세상이 나란히 펼쳐져 있는 느낌을 받았다.
아래쪽에는 하루가 끝났다는 듯한 짙은 회색의 그림자가 있고,
그 위에는 아직 마지막 햇빛을 머금은 따뜻한 색의 띠가 이어져 있었다.
빛과 어둠이 서로 이야기하는 장면 같아서, 그 아래에 서 있는 내가 아주 조용한 기도의 시간에 들어간 것처럼 느껴졌다.
왜 비너스의 띠 라고 불릴까
이름만 보면 금성과 직접 관련된 현상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금성과 상관이 없다.
고대부터 분홍빛, 살색, 붉은빛을 아프로디테(비너스)의 상징색으로 여겼기 때문에
해가 진 뒤 나타나는 섬세한 분홍빛 하늘을 비너스의 이름과 연결해 부르게 된 것이다.
하루의 마지막을 감싸는 가장 부드러운 빛
비너스의 띠는 강렬하지 않다.
무지개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틈새빛살처럼 극적인 대비를 만들지도 않는다.
그 대신 조용하게, 자연스럽게, 하늘의 끝에서 퍼져 나온다.
해가 진 뒤에도 하늘은 여전히 빛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며
하루를 덮는 마지막 장면으로써 아주 부드러운 인상을 남긴다.
분홍빛 띠와 그 아래 푸른 지구 그림자가 나란히 놓인 하늘은
언제 보아도 마음을 조금 느슨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현상은 매일 나타날 수 있지만, 눈여겨보는 사람만 발견할 수 있다.
비너스의 띠는 그래서 더 특별하다.